'2+2=5'에 해당되는 글 61건

  1. 2011.08.23 연인
  2. 2011.08.12 최초의 인간 2
  3. 2011.08.12 그들이 사는 세상

연인

psyche 2011. 8. 23. 20:02 |


   2011년 8월 16일 01시 22분. 양화대교 남단. 
  홍대 근처에서 출발해 한강을 건너 집까지 걸어가는 중. 저어-기 멀리,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한강 둔치 그네에 앉아있다. 그 풍경을 찍어본다. 아이폰3GS는 카메라 화소수가 높지 않아,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찍은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마치 점묘화처럼 보인다. 이렇게 찍힌 사진들이 종종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경우가 있다.     
   요새는 거리에서 서로 다투고 있는 연인들을 보면 그 모습이 참 부럽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보고 싶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화".  화를 내 본 것 자체가 굉장히 오래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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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psyche 2011. 8. 12. 19:39 |
   8월 10일, 미디액트 [영화는 영화다] 수업 종강. 원래 3일이 종강이었는데, 7월 말 폭우로 수업이 한 주씩 밀려 10일이 마지막 수업이 되었다. 원래 10일은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공연을 보려고 예매를 해 놓았었는데, 김곡 감독의 수업, 유종의 미(?)를 위해 다니엘 바렌보임 선생님은 포기. 그래서 이번 베토벤 교향곡 연주회는 마지막날 공연만 보게 되었다. 

  종강 뒷풀이에서는, 또 많은 영화의 제목들이 서로 오고갔는데, 예의 반골정신이 발동하여 내게 영화 추천을 부탁하는 몇몇 동생분들께 "그런데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더 중요해요."하고 대화를 매죠오우지하고서는. 

   회사를 안 다니니 좋은 점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늘었다는 것. 지금 랩탑 옆에 두 권의 책이 있다.  [레우코와의 대화],  [최초의 인간].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소설 [레우코와의 대화]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영웅들의 대화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트라웁-위예의 <그들의 이런 만남들>, 그리고 다니엘 위예가 세상을 떠난 후 장 마리 스트라웁이 홀로 만든 첫 번째 작품 <아르테미스의 무릎>이 모두 [레우코와의 대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두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이미지는 매우 정적이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가슴을 요란하게 뛰게 만들었던 영화다. 원작인 [레우코와의 대화]도 그 묵묵한 박력이 놀랍다. 파베세는 특유의 염세주의로 신화를 다시 쓰는데, 겪은 자로서 '부질없음'을 이야기하는 영웅들의 나즈막함이 깊이 숨겨진 세상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 같아 두렵고 감동적이다.   
 
  "
박케 :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군요, 오르페우스. 그런데 당신의 생각은 오로지 죽음뿐이에요. 한 때 축제가 우리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주었지요. 오르페우스 : 그러면 당신들은 축제를 즐기세요. 아직 모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요. 각자 한 번은 자신의 지옥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어요. 내 운명의 환희는 하데스에서 끝났어요. 내 방식대로 삶과 죽음을 노래하면서 끝났지요. 박케 : 그런데 운명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그리고 [최초의 인간]. 
  "알베르 카뮈는... 아버지가 1차 세계 대전에 참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한 후 그는 빈곤 속에서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카뮈가 문맹인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혹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즉, 주인공이 자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전쟁터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역사를 찾아나서는 내용의 [최초의 인간]은 카뮈 본인의 이야기.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카뮈는 교통사고로 사망. 미완의 유작.  [최초의 인간]은 아직 절반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이 지금 굉장히 절절하게 읽히는 것이 최근에 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타인의 역사'이기 때문. 타인이면서 또 다른 나, 스스로의 거울이 될 수 있는 '피붙이'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 이 소소한 욕망의 기원은 <몰랐던 것들>(2005, 김재식 감독)이라는 단편영화.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제삿날 즈음에 아버지가 남극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발견되는 데, 그 남극 어딘가에 서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심어놓은 알 수 없는 울림이 여전히 마음 한 켠에 남아있어서.     
  알베르 카뮈 전집이 나와있네. 다 읽어봐야겠다.


   "...일생 동안 일만 하고 지내다가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였고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나 달게 받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손상되기를 거부했던 강인하고 씁쓸한 표정의 한 사내. 요컨대 가난한 사내... 그는 연신 뛰어가다가 뒤돌아보며 밀짚모자를 흔들어 응답하더니 먼지와 더위로 잿빛이 된 거리로 달려나갔고 더 멀리 영화관 앞 아침 나절의 눈부신 햇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 뒤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담의 오류], ][과학혁명], [인터페이스 연대기], [감각의 단면], [군중과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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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

psyche 2011. 8. 12. 17:41 |
  알 수 없이 이렇게 답답한 마음,
  요새는, 극장에서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본다 하면, 물론 그 내용 때문에 먼저 분노하고 불쾌해지지만, 그렇게 치열한 현실을, 시원한 실내에 편하게 앉아 바라보고 있다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부조리한 거 같아서, 그래서 뭔가 꺼림직한 기분이 들곤 한다. 심지어는, 집회에 참가해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지금 내가 소화기 분말을 마시고, 최루액에 눈물콧물 질질 흘려도, 만약 경찰 방패에 찍혀 갈비뼈가 부러진다해도, 결국 또 이렇게 그럴듯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그럴듯한 인테리어의 카페에 앉아, 조잘대는 커플들에 둘러싸여 혹은 편안한 복장으로 편안히 내 방 안에서 랩탑을 켜고, 완전한 소멸을 준비하기 위해 헛소리를 늘어놓겠지. 
  바꿀 수 있다. 그런 다큐를, 그런 영화를 만들고, 그런 영화를 보고, 함께 나누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거리로 나가고, 어떻게든 행동하면 바꿀 수 있다. 조금씩 바뀐다. 그렇게 역사는 바뀌어 왔다. <낙타는 말했다>라는 (한국/독립/장편)영화의 그 포악한 주인공 남자가 생각난다. 그는 나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 그는 날것이다. 돈이 없고, 교양이 없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혹은 왜 그를 그런 상태로 그대로 놓아두었나. 돈과 교양, 그 두 가지만 얘기해 보고 싶다. 특정 사안에 대한 가치 판단 여부 외에 그리고 기본적인 성정을 제외한. 교양의 사전적 정의는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돈과 최소한의 교양을 가질 수 있다면... 자, 이런 이분법을 얘기하고 싶다. 가진 것도 많고, 교양도 철철넘치는 당신, 가난해도 매우 높은 교양 수준을 가지고 있는 당신(문화 권력만 가지고 있는), 교양은 별로 없어 그래도 자본주의의 은총으로 잘 사는 당신 그리고 나. 우리는 모두 같은 사이드. 우리의 공통점은 최첨단 비인간 행위자에 접근 가능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 "그럴듯 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에 의해 조장되고 꾸며진 것이든 뭐든지 간에 하여튼. 그리고 우리의 대척점에 어쩌다 보니 돈도 교양도 풍족하지 않은 소소소시민이 있다. 가난이 죄가 아니고, 앎이 부족한 것이 죄가 아니다.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 가능하면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을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했을 때, 가난하고 교양이 적은 사람들이, 비록 그렇더라도 그들이 그대로 행복하다면 괜찮아. 플러스 알파로 그들의 물질적 정신적 '형편'을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들면, 그들이 조금 더 행복해 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질 수 있으니, 참으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사이드에, 그들을 오직 착취가 용이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갈등을 조장하는 개자식들이 있어서. 그런데, 그런 개자식들의 간교함에 맞서 투쟁하는, 아마도 어느 정도의 교양을 소유하고 있을 사람들과 또 나 자신을 그 개자식들과 같은 사이드로 바라보는 것은, 그렇게 나누었을 때의 이 쪽과 저 쪽의 벽이 가장 높은 것 같아서. 아무리 정의를 부르짖고, 봉사활동 하고, 기부를 하고, 투쟁을 해도 이 모든 게 다 문득 공허로 사라지는 것 같아서. 가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이 왠지모를 불편함 때문에, 말이 없어지곤 한다. 묵묵히 만들 뿐, 묵묵히 싸울 뿐. 
  아마도, 이 곳이 고민이 부족한 세상 같아서, 내가 땡깡을 부리고 있는 듯.
  계속 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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